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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문학·예술·신학·법 학문의 중심지 된 ‘천년 왕국’

땅꼬마&갈대상자 2023. 3. 4. 12:59


비잔티움 제국 또는 비잔티움 제국은 서기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 1000년 이상 존재했던 로마 제국의 연속이었다. 이 제국은 서기 324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세워졌고 멸망할 때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역할을 했다.

초기 역사(324-527 AD)

비잔티움 제국의 기원은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의 고대 그리스 도시 자리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세웠다. 콘스탄티노플은 전략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했고, 그 위치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들 아래에서 로마 제국은 계속해서 팽창했지만, 내부 분열과 외부의 위협에도 시달렸다. 서기 395년, 로마 제국은 로마에 기반을 둔 서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에 기반을 둔 동로마 제국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비잔티움 제국으로 알려지게 된 동로마 제국은 둘 중에서 더 번영하고 안정적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하의 비잔티움 제국 (527년-565년)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황제는 기원후 527년부터 565년까지 통치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다작의 건축가이자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그의 치세는 기념비적인 건축과 문화적 업적으로 기억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 하에서 로마 제국을 재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 그의 군사 작전으로도 기억된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이탈리아의 동고트족, 스페인의 서고트족을 상대로 일련의 성공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캠페인은 비용이 많이 들었고 궁극적으로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또한 로마법을 성문화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는 코퍼스 율리우스 시민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법의 성문화는 서구의 법체계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변호사와 법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참고되고 있다.

비잔티움의 암흑기 (565년-800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후, 비잔티움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제국은 내부 분쟁에 시달렸고 페르시아 제국, 슬라브족, 아바르족의 외부 위협에 직면했다. 제국은 또한 6세기 중반에 페스트의 파괴적인 발발을 겪었고, 이는 인구를 감소시키고 경제를 약화시켰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이 쇠퇴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침입을 물리치고 제국의 국경을 방어할 수 있었던 비잔티움 군대의 힘과 회복력이었다. 제국의 경제는 또한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로의 기로에 위치한 덕분에 비교적 강한 상태를 유지했다.


마케도니아 왕조 (867년-1056년)의 비잔티움 제국

9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서기 867년부터 1056년까지 지속된 마케도니아 왕조의 부활을 경험했다. 이 기간 동안, 제국은 문화적, 경제적 성장의 시기를 감독한 강력하고 유능한 황제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비잔티움 제국의 국경을 확장한 것이다. 제국은 불가리아의 대부분과 아르메니아, 조지아, 시리아의 일부를 정복했고,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도 세력을 구축했다.

마케도니아 왕조는 또한 그들의 후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콤네니아 왕조의 비잔티움 제국 (1081년-1185년)

1081년부터 1185년까지 지속된 콤네니아 왕조는 비잔티움 제국의 또 다른 부흥기였다. 이 왕조는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에 의해 세워졌고, 그는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고 군대를 개혁했다.

콤네니아 왕조 하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문화적, 예술적 부흥을 경험했다. 황제들은 예술의 후원자였고,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들이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는 미카엘 프셀로스와 안나 콤네네와 같은 학자들의 작품들이 국제적인 찬사를 받으며 비잔티움 문학과 철학이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콤네니아 왕조는 또한 많은 군사적 후퇴로 특징지어졌다.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와 노르만족의 침략에 직면했고, 궁극적으로 소아시아에서 영토의 많은 부분을 잃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안젤로이 왕조의 비잔티움 제국 (1185년-1204년)

1185년부터 1204년까지 지속된 앙겔로이 왕조는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기였다. 이 왕조는 초기에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 이사크 2세 앙겔로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일련의 군사적 패배와 경제적 위기로 인해 제국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안젤로이 왕조는 또한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에 의해 시작된 제4차 십자군의 위협에 직면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120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다.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다. 이 사건은 지중해의 주요 강대국으로서 비잔틴 제국의 종말을 알렸다.


망명 중인 비잔티움 제국 (1204년-1261년)

제4차 십자군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분열되고 약화되었다. 그러나 추방당한 비잔티움의 지도자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통치에 계속 저항했고 소아시아의 도시 니카이아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

테오도로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의 지도 아래, 니케아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이전 영토의 대부분을 재통합할 수 있었다. 1261년, 그들은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강대국으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후기 비잔틴 제국 (1261년-1453년)

후기 비잔티움 제국은 일련의 외부 위협과 내부 투쟁으로 특징지어졌다. 제국은 점차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한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에 직면했다. 제국은 또한 일련의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약화되었다.

이러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후기 비잔티움 제국은 계속해서 중요한 문화적, 예술적 업적을 남겼다. 이 제국은 크레타의 테오파네스와 엘 그레코와 같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의 고향이었고, 조지 게미스토스 플레톤과 마누엘 크리솔로라스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도 배출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결국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견딜 수 없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점령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은 중세 시대의 종말과 유럽의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