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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털어 수천명 살린 제주도의 거상 김만덕은 누구?



김만덕은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부유한 한국 상인이었다. 그는 그의 자선 행위와 한국 역사상 큰 위기의 시기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을 기아로부터 구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 삶과 경력

김만덕은 1739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고 쌀과 다른 상품들의 무역에 종사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김만덕은 젊은 시절 아버지의 사업에 뛰어들어 스스로 성공한 상인이 되었다.

김만덕은 사업 감각과 수익성 있는 거래를 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그는 빠르게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중 한 명이 되었고 그의 지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그의 관대함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기꺼이 돕는 것으로 유명했다.

1764년-1766년의 대기근

18세기 중반, 한국은 1764년부터 1766년까지 지속된 가뭄과 기근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이 시기는 농작물이 흉작이 되고 식량이 부족해짐에 따라 한국 국민들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죽었고,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김만덕은 주위에서 본 괴로움에 감복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곡식과 다른 식료품들을 사기 위해 그의 재산을 사용했다. 그는 또한 난민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수프 주방을 설치했다.

김만덕의 노력은 기근 기간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웅이자 구세주로 알려지게 되었고, 관대하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으로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천연두의 확산

1776년, 천연두가 한국을 휩쓸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광범위한 공포를 일으켰다. 이 질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치명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집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김만덕씨가 다시 한번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는 그의 재산을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약과 다른 보급품들을 사기 위해 사용했고, 그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격리 구역을 설치했다. 그는 또한 병원을 짓고 의학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돈을 기부했다.

김만덕의 노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천연두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결국 질병의 확산을 억제할 수 있었다. 김만덕은 다시 한번 영웅이자 생명의 은인으로 칭송받았다.

1592-1598

1592년, 일본은 6년 동안 지속된 길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시작하면서 한국을 침략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그 침략은 한국인들에게 파괴적인 사건이었다.

김만덕의 가족은 침략 과정에서 모든 재산을 남기고 집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만덕은 그의 동료 시민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의 재산을 난민들에게 음식, 옷, 그리고 피난처를 제공하는 데 사용했고, 그는 한국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돈을 기부했다.

김만덕의 공헌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조선인들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관대함과 동정심은 그의 동료 시민들의 존경과 존경을 받았다.


업적

김만덕의 업적은 한국에서 수세기 동안 기념되어 왔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의 삶을 헌신한 영웅이자 자선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기근, 질병, 전쟁의 시기에 그의 공헌은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더 강하고 회복력 있는 한국 사회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재산 털어 수천명 살린 김만덕

만덕의 아버지도 건입포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만덕이 12세 때 아버지는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친척 집에 살던 만덕은 어린 나이에 기녀(妓女)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제주 목사를 찾아가 양인으로 환속시켜 줄 것을 요청했고, 객주를 차렸다. 조선시대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면서 물건을 맡아 주고, 팔아 주고,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하던 집이다. 김만덕의 물산객주(物産客主)는 위탁매매는 물론이고 숙박, 금융, 도매, 창고, 운반 등 전방위적인 비즈니스를 했다.

만덕의 사업 성공 비결은 육지와 섬에서 나는 물건의 시세 차익이었다. 그는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제주마, 말총, 양태, 진주, 우황, 미역 등 특산물을 육지에 판매했고, 대신 척박한 제주로 귀한 쌀과 소금을 들여왔다. ‘신용본위(信用本位)’를 내건 만덕은 적극적으로 선상(船商)을 유치하고, 관가에 물품도 공급하며 제주 최고의 거상이 되었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

김만덕 기념관(제주 산지로)에 재현된, 굶주린 이웃에게 쌀을 나눠주는 만덕 할망의 모습. 김만덕이 조선시대 전국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조 18년(1794년)의 일이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갭인년 숭년(갑인년 흉년)’으로 불리는 참혹한 재난의 해였다. 가뭄과 태풍이 반복된 그해에 거리엔 굶어 죽은 시체로 가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제주 산지로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에 가면 각종 기록과 멀티미디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만덕 할망’의 행적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당시 제주 목사 심낙수는 “동풍이 강하게 불어와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 날리는 것 같다”며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정조 임금은 제주도로 급하게 구휼미를 보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구휼미를 실은 배마저도 난파돼 재난은 더욱 심해졌다. “정조 19년(1795년) 윤 2월 진휼곡 5000석을 실은 배 12척 중 5척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난파됐다. 이즈음 제주 백성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정조실록)

이를 본 만덕은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내 구휼에 나섰다. 당시 만덕이 육지에서 사들여 관가에 실어나른 쌀은 제주도민 전체가 열흘간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수천 명의 제주민이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정조는 김만덕을 높이 치하하고, 신하들에게 그녀의 삶을 널리 알리는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회경제 개혁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정조는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는 롤모델로 만덕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을 비롯해 수많은 공경대신이 ‘만덕전’을 지었다.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가득 차다)’라는 글씨로 김만덕의 의로움을 찬양했다.

김만덕은 조선왕조실록이나 당대의 많은 문집에서 ‘협사(俠士)’ ‘열협(烈俠)’ ‘의열사(義烈士)’라고 불렸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의로운 일을 해낸 영웅에게 던지는 찬사다. 극심한 가뭄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렸으니 ‘구휼 의인’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출처: 동아일보

오늘날, 김만덕은 한국 전역에서 동상, 기념비, 그리고 다른 기념비들로 기념되고 있다. 그의 유산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역할을 하며, 우리에게 관대함과 연민의 힘을 상기시킨다